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후(기원전 7세기) (문단 편집) == 청주 한씨 족보 == 청주 한씨 족보와 속기자지에 기록된 기자조선의 왕계보도[* 후대의 숭조작업으로 왜곡되어진 것으로 현재 사학계에서는 '''역사적으로 가치를 두지 않는다.''']에 따르면 이 당시 고조선(기자조선) 군주의 시호는 효종왕(孝宗王)[* 고조선 군주가 처음 칭왕한것은 300년 뒤의 기원전 4세기의 조선후때부터 이기에 기원전 7세기의 고조선 군주가 왕을 칭했을리는 전무하다.][* 속기자지와 청주한씨 족보에 따르면 효종왕의 재위 기간은 기원전 675년~기원전 658년으로 제환공의 재위 기간에 전부 포함되며 효종왕의 제나라 관련 기록으로 보아 제나라,노나라와 교역했다는 선대 군주인 정경왕(貞敬王) 궐(闕)과 함께 기원전 7세기 발조선이 제나라와 교역했다는 관자의 기록이 투영되어진 것으로 추측된다.], 휘는 존(存)이라고 하는데 '''근거는 전무하다'''. 한편 20세기 초에는 이와 같은 기자조선의 왕계보도가 일부는 역사로서 수용되기도 했는지 대한제국 시기의 여러 역사 교과서[* 대표적으로 1906년 발행된 중등 역사 교과서인 동국사략과 독립운동가 황의돈이 저술한 대동청사가 있다.]에 효종왕과 효종왕의 치세에 대한 기록[* 효종왕(孝宗王) 존(存)은 선우익(鮮于益)을 제나라에 보내어, 환공(桓公) 강소백(姜小白)의 정치를 관찰하여 범장률(犯贓律)을 제정하였다. 제나라에서 보낸 사신 공손각(公孫恪)을 후하게 예우하였고, 선비(鮮卑) 서백리(西伯里)의 추장, 길리도두(吉利都頭)에게 상을 주었다.][* 1906년 출간된 역사 교과서인 동국사략에 수록된 효장왕의 기록으로 기원전 7세기 고조선이 제나라와 교역했다는 기록을 과장시킨 것으로 보인다.]이 수록되기도 하였다. 현재는 학계에서 [[기자조선]] 자체가 부정되며, 족보는 조작이라는 것이 정설이므로 21세기 기준 이 기록은 인정되지 않는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